잠실에서…
@ 350D/18-55, 잠실, 2005
잠실에서…
@ 350D/18-55, 잠실, 2005
결혼 후 첫번째 맞는 크리스마스
친가 쪽으로는 친척이 많지 않은데, 종환형님은 6촌간이다. 나이차는 많이 나지만 형처럼 대해주셔서 편하게 얘기도 하고, 때론 선배로서 충고도 해주시고…
이 사진도 1년이나 지났지만 다시한번 축하드려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당신 고향인 경북 군위군 소보면 양지바른 선산에 산소를 모셨다. 장례를 치른뒤 49재때 산소를 돌아보고 올라오는 길에, 고모가 사시는 충주에 들렀다. 충주호 공원에서 가족들과 모처럼 한가로운 소풍중에.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신뒤 더 빨리 나이드시는것 같다.
고모와 할머니, 많이 닮으셨다.
동생 동욱이와…
할아버지께서는 잔병치레 없이 80평생을 건강히 일하시며 즐겁게 사셨다고 한다. 70이 다 되시도록 평생 하시던 채소 농사도 (비닐하우스를 임대하여 일하는 분들을 고용하고 채소를 길러 파셨고 나는 이를 “상업”이라는 뜻도 모르는 직업으로 알고 커왔다) 거뜬히 해내신 분이셨다. 나는 어려서 부터 특히나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터라, 할아버지가 갖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크고 가슴아린 추억이었다.
수술을 받으시고 (폐의 3/4를 떼어내셨다) 숨가빠하시면서도 이젠 다 나았으니까 걱정말라던 할아버지께 큰 손주 며느리감을 소개시켜드리고, “이쁘다”를 연발하시던 할아버지가 비록 숨쉬기 힘드실지라도 오래오래 사셔서 증손주도 보실줄 알았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는 2005년 6월 즈음,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시던 할아버지께 두 번째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주치의가 제거한줄 알았던 암세포가 다시 발견되어 뼈와 다른 조직으로 전이되었고 더 이상 수술은 불가능하며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는거 외에는 손 쓸 수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다 나으셨다고 좋아하시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가족들은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체 숨죽여 울어야했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를 위해서, 돌아가시기 전에 두 손주중 하나라도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예정보다 다소 무리하게 결혼을 앞당겨 8월 땡볕에 결혼식을 잡았다. 이런 와중에 할아버지의 병세는 나날이 안좋아져 가고, 결혼식이 먼저냐 할아버지 눈감으시는 날이 먼저냐를 항상 걱정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평생의 한번뿐인 결혼식을 이러한 이유로 멋있고 찬란하게 치르지 못해 나는 내 아내에게 평생의 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할아버지도 당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시게 되었고, 우려했던것과는 달리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래, 살만큼 살았다. 죽기전에 너 결혼하는거나 봐야지”.
교회 호스피스 관련일을 보셨던 고모를 통해 경기도 용인에 샘물호스피스 라는 말기암 환자 요양소에서 종교의 힘을 빌어 요양하시다가, 결혼식날 진통제에 의지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음 부터 끝까지 웃으시며 내 결혼식을 보셨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그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결혼식을 하게된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고, 그로 인해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어서 내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던것 같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처가에서 마련해주신 이바지음식을 들고 요양소로 찾아가 새로운 가족을 정식으로 인사시켜드리고, “떡이 참 맛있다.” 하시며 평소보다도 더 맛있게 음식을 드셨다. 할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사진도 찍고…
할아버지는 2005년 9월 신혼여행 후 인사드린 그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평생을 함께 아웅다웅 살아오신 할머니와 비상등을 켜고 고속도로 갓길로 달려가신 아버지를 옆에 두시고 큰 힘듦없이 예배하는 시간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동현아, 할아버지 방금전에 돌아가셨다”라는 울먹임섞인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평생을 소리내어 울어본적없는 내 가슴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평생을 시집살이하며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유일하게 시집에서 어머니를 다독여주셨던 할아버지의 소식에 어머니와 서로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나를 “이럴때 장남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다독여주는 아내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동생덕에 친척들께 일일이 연락드리고, 영정사진을 마련하고, 필요한 준비를 해서 미리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보라매 병원 영안실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고, 가끔은 우리 어떻게 사는지도 봐주세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가난한 자를 위한 몰디브”란 말을 듣고 있는 필리핀 팔라완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마음은 몰디브지만 “시간관계상” 필리핀으로. 나중에 아이의 손을 잡고 여유있게 몰디브엘 가자는 다짐을 하고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싣다.
저녁 결혼식에, 간단히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고 호텔에 들어선 시각이 새벽 1시. 3시간 정도를 자고 그 비싼 호텔비를 내고 (친구들이 잡아줬다고) 새벽을 가르며 공항에 도착.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이드와 만나 늦은 점심을 먹고,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카지노엘 갔다. 아내는 카지노가 처음이고, 나는 라스베가스 출장때 한번 가본 (이때 25센트 슬롯머신에서 100여불을 땄다는 -.-v) 적이 있었는데, 우린 돈을 따는게 아니라 카지노를 즐기자는 마음에 일인당 만원? 정도씩을 바꿔 이 돈을 다 잃을때 까지 이것저것 해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필리핀 국내선을 타고 팔라완으로 들어가려는데, 가이드가 “가끔 고장으로 비행기가 늦어지기도 하니까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제일 늦은적이 3시간인데.. 딱 한번 그랬어요”란다. 그렇다. 우린 그날 3시간 반을 공항에서 비행기가 출발하기만 기다렸다. 탔다 내렸다, 탔다 내렸다, 탔다. 이제야 출발한다. “하하. 우리가 그 기록을 깼네~~!!”
팔라완 공항은 어이없다, 귀엽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비포장 활주로다. 그렇다. 비포장이다.
하늘에서는 그냥 길인줄 알았던 그곳이 비행장이다. 드드드드드드…. 흙먼지와 함께 무사히 비행기가 멈추고, 나뭇잎으로 엮은 조그만 공항은 대부분 우리가 묵을 클럽 노아 이사벨 리조트로 가는 사람들이었고, 리조트에서 마중나온 가이드를 따라 미군 짚차를 개조해 만든 지프니(버스)를 타고, 다시 방카(배)를 타고 리조트에 들어갔다.
마닐라에서 다시 가이드와 만나 피나투보 화산 트래킹을 하고 (음.. 별로였다) 쇼핑을 하고 (으례 신혼여행에는 양가 선물을 무척이나 빠방하게 한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30살의 그녀”와 “31살의 그”가 2006년 8월 26일에 결혼하다.
각자 살아온 시간보다 함께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은, “가족”으로서의 첫발을 어느 무더운 8월 저녁에 내디뎠다.
그 날 새벽 다짐이 눈 감는날까지 변하지 않도록… 결혼 1년 후의 오늘에 다시한번 다짐한다.
참 많이도 다른 두 사람, 참 많이도 비슷한 두 사람…
더 이상 두사람이 아닌 “우리”, “부부”로 하나되어 1년간 살아온 하루 하루를 되짚어 보면
“하나”가 되기 위한 많은 아픔과 다툼과 시행착오와 함께 지금의 1년된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이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꽉 물려서 돌아갈 수 있을까.
31년을 같이 살아온 가족들에게서 느끼는 편안함과, 아직도 알 수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되돌아 보면,
평생을 같이 살아도 모르는게 부부라는데… 설령 꽉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씩 서로의 바퀴에 홈을 파내어 맞춰가다 보면 잘 돌아가는 하나의 톱니바퀴가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이제는 “30살의 그녀”가 아닌 “1년차 아내”로 “31살의 그”가 아닌 “1년차 남편”으로 후회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갈것을 되세긴다…
눈감는 날까지.
ps) 위독하신 할아버지를 위해 서둘렀던 결혼인데, 이 날 할아버지는 큰손주 결혼식이라고 독하디 독한 진통제를 맞으시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신체 저렇게 즐거워하고 계신다. 이 날이 사진으로 남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His 31 years…
Her & His 1 and half years…
For Her & His remaining years…
결혼기념 DVD 제작 사진 중에서…
선글래스도 사드려야 하는구나.. ㅎㅎ
결국 지난주에 근사한것으로 하나 장만해드림 🙂